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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휴관일
8일, 22일 입니다.
임실치즈테마파크
Cheese 1967~ 임실치즈의 역사가 대한민국 치즈 역사입니다
1958년 특산품도 없는 전북 임실군에 벨기에의 지정환 신부가 선교사로 왔습니다. 당시 임실군수는 지정환 신부에게 임실의 신자들만을 위한 활동뿐만 아니라 임실군 전체를 위한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임실군수의 간곡한 부탁에 지정환 신부는 여러 가지 고심 끝에 산양 두 마리로 농민들과 함께 치즈 제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산양을 키워 산양유를 판매하였으나 판매가 부진하였습니다. 임실군에서는 남은 산양유를 처리하기 위해 치즈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1966년에 처음 만든 치즈는 맛과 냄새가 생소하고, 더욱이 치즈 제조 기술도 낮아 만든 치즈의 품질이 좋지 않아 생산이 지지부진하였습니다.

지정환 신부와 농민들은 그 당시 전주 예수병원의 외국인 의사들이 치즈를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산양이 아닌 젖소를 키워 우유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냉장시설이 없어 우유는 쉽게 변질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정환 신부가 프랑스 낙농학교에 편지를 보내 효소 사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효소라는 것에 대해 생소했기 때문에 막걸리에 사용하는 누룩을 사용하여 치즈를 만들고자 하였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가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는 계속되었고 농민들은 우유값을 받기도 어려운 실정이 되었습니다. 농민들이 우유 생산을 꺼려하자 지정환 신부는 개인 재산을 팔아 농민의 우유를 사주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다시 지정환 신부는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치즈 공장에서 한달 정도 근무한 초보 기술자를 임실군으로 보냈습니다. 그 기술자의 도움으로 어렵게 1968년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까망베르 치즈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일반인들은 치즈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까망베르 치즈 판로가 막막하였습니다. 결국 기술자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갔고 교황청과 신부님의 조카들이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더 이상의 발전도 없었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때까지도 농민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지정환 신부를 따랐습니다.

결국 1969년에 지정환 신부는 직접 유럽으로 치즈를 배우러 갔습니다. 석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자 신부를 의심한 농민들이 젖소를 팔고 고향을 떠나버렸습니다. 지정환 신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단 한사람만이 소를 팔지 않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지정환 신부는 농민과 함께 다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소 한 마리에서 하루에 나오는 우유는 10L였지만, 그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치즈는 1kg정도 였습니다.

지정환 신부는 다시 청년들을 설득하여 치즈만들기를 시작하려 했으나 허가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치즈사업이 처음이었던 터라 허가 기준도 없는 상태여서 관련 기관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지정환 신부가 직접 농림부 차관을 찾아가 허가를 부탁하였는데, 농림부 차관은 치즈 사업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지정환 신부는 허가 없이 공장을 운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소를 키우는 농가는 늘어났지만 치즈의 판매는 역시 부진하였으며 우유 값을 받지 못한 농민들은 빚만 지게 되었습니다.

1970년에 지정환 신부는 저장기간이 짧고 보관이 힘든 카망베르 대신에 3개월 이상 보관할 수 있는 체다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본관이 미비했던 임실공장에서는 변질을 우려하여 치즈를 썰어보지도 못하고 처음 만든 치즈 7kg을 미사리에 있는 외국 전문상품에 판매를 부탁하였습니다. 그중 500g을 조선호텔로 가져갔는데 양식당 주방장의 반응이 아주 좋아 호텔식당에서 10일에 70kg씩 사용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특급호텔과의 계약으로 거래처가 늘어나게 되어 물량 공급이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공장을 확장하고 설비를 증설하였습니다. 산양조합은 신용협동조합형태로 변화하고 조합원 자녀학자금도 지급할 수 있을 정도로 나날이 발전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정환 신부가 농민들과 함께 만든 임실치즈는 한국에서 만든 최초의 치즈가 되었습니다. 또한 지정환 신부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사회운동을 하는 등 농민들의 자립심을 키워주는 임실 농민들의 농민의식을 끌어올렸습니다. 이러한 발전 과정 중에 삼양사가 우유와 제조비를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치즈를 만들어 달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처음엔 한 달에 400kg, 1년 후에는 1000kg, 2년 후에는 1500kg으로 주문량을 늘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 삼양사의 공장 확장 제의에 의하여 삼양사와의 치즈 거래는 막을 내렸습니다.

1970년대 중반 서울 명동에 있는 국내 최초의 피자 가게에서 임실에 찾아와 비싼 가격에 수입해서 쓰는 모짜렐라 치즈를 대체할 수 있는 치즈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모짜렐라 치즈 제조 방법을 모르던 신부는 다시 유학길에 올랐고 치즈 제조 방법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나라 풍토에 맞게 적용시켜 실패를 거듭한 후에 미국 치즈와 맛이 유사한 우리나라 최초의 모짜렐라 치즈를 1976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지정환 신부는 민주화 운동으로 문제가 생겨 조합에서 물러나고 조합원 중에서 이사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새로운 이사장을 중심으로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작업에서 현대기계를 도입하여 치즈의 품질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공장을 확장시키면서 산양조합을 신용협동조합으로 발전시켰습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치즈 공장을 늘리도록 하여 공장을 신축하였는데, 공장 직영에서 대리점 체제로 경영방식이 바뀌어 어음을 받으면서 경영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다시 조합원들은 생계가 어려워졌으며 가축병까지 돌아 소들은 죽고 조합원들은 다시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에서는 조합원들을 불러들여 많은 조합원들이 탈퇴하였습니다.

그 무렵 제주도에 치즈 농장이 생겨 우유를 공급받기가 어렵게 되고, 지정환 신부에게서 기술을 익힌 기술자들은 다른 업체에서 스카우트해가는 등 위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상황이 나빠지자 신용협동조합의 형태를 축산협동조합의 형태로 바꾸기로 결심하고, 1994년 우여곡절 끝에 축협중앙회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자본이 부족한 조합이었기 때문에 축협중앙회의 관리 아래 낙농진흥회에 가입하게 되고 잉여 우유를 공급 받아 원유 걱정 없이 치즈를 만들고 다양한 식품들을 치즈에 접목시켜 새로운 치즈를 개발하여 지금의 임실치즈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